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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살해된 지구에서 살아남는 방법

by 슈퍼런치박스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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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어느 오전.

 

늦잠을 잤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TV의 전원을 켰다.

 

여느 때처럼 TV 아침마당에서 갱년기에 좋은 음식을 떠들거나, 아니면 월드 뉴스에서 북극의 빙하가 거의 녹아 북극곰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회색 빛 양복을 입은 중년 아나운서가 심각한 얼굴로 지구가 살해되었다는 Breaking New를 방송하고 있었다.

 

 

 

 

“지구가 살해당했습니다. 음… 너무 뜻밖의 소식이라 참담함이 이루 말 할 수 없는데요. 다시 한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구가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한 살해 추정시간은 혈흔을 보건데 전날 밤 11시라고 했다.

 

살해 장소는…

 

살해 장소는… 사실 중요하지 않은지 굳이 나오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태양에서 1AU 거리에 있는 태양계라고 해야 할까?

 

지구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소가 뭐가 중요할까?



“지금 세계의 경찰인 미국은 다른 G7 나라들과 공조하여 특별 수사팀을 꾸리고 있으며 매일 실시간으로 조사 내용을 전 인류에게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보니 수사팀도 전례없는 대규모로 꾸며지는 것 같았다.

 

다른 채널로 돌려보았다.

 

과학자, 시민단체, 종교계 사람들 여러명이 흰색의 커다란 원탁에 둘러 앉아 살해된 지구에서 향후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지구가 살해당했다고 해도 당장 자연 생태계에 달라지는 점이 없습니다. 만약 태양이 살해당했다면 에너지원이 소멸되어 큰 파멸을 불러 일으켰겠지만 지구는 본인보다 태양과 주변 행성들의 상호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나마 피해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단언하는 거 아닙니까? 지구가 살해당한 상황인데요. 지구는 바로 신입니다. 그리고 지금 신이 살해당한 것이라구요. 우리에게 미래가 없어요. 지구가 살해 당했듯이 인류도 멸망할 겁니다.”



“정말 지구가 살해당한 것이 맞긴 하나요? 왠지 저는 이것이 하나의 음모론같은데요. 온 노동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 여권 퇴진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 마당에 갑자기 지구 살해요? 이거 국민들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정부의 음모 아닌가요?”



아수라장이 아닐 수 없다. 과학자나 종교계 인사나 시민단체나 그냥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이크에 떠들어대고 있었다.

 

지구가 죽었다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제일 먼저 지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지만 TV속의 그들은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명도를 올리려고 혈안이 된 아귀떼 같았다.

 

다른 TV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내용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구가 살해 당했다는 것 말고 그다지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씻기 위해  샤워기를 틀었다.

 

미세플라스틱이 함유되어 까끌까끌한 각질 제거 전용 세안 비누의 거품을 잔뜩 묻혀 얼굴과 몸을 박박 비볐다.

 

피부의 더러운 때와 함께 미세 플라스틱 거품이 하수구를 통해 사라져간다.

 

시장했다.

 

냉장고 문을 여니 어제 먹다남은 배달 떡볶이가 1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억지로 먹고, 집을 나서기 전에 쓰레기장에 내놓은 재활용품을 따로 모아놓았다.

 

나 혼자 밖에 살지 않는데…

 

기존에 버린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내 머리 키보다 더 많은 1회용 플라스틱들이 100리터 검은색 비닐 봉투에 가득 찼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이미 타고 있는 아주머니 둘이 살해당한 지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우리 애 수능이 한달도 안남았는데.”



“날벼락이지 뭐예요. 지구가 죽어서 부동산 집값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몰라. 뒤숭숭한데 빨리 범인이나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1층에 도착하고 맨 뒤로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무겁지는 않지만 부피가 큰 재활용품들이라 낑낑대며 들면서 쓰레기장을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범인은 누구일까? 

 

나 역시 감히 지구를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굳이 밝혀야 하나하는 마음속 스멀스멀 불안감이 들었다.

 

비록 타의에 의해 태어났다고 하지만 근 30년을 살면서 이 편리한 도시의 이기를 누리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짓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지구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 들이었다.

 

어쩌면… 지구를 살해한 그 범인은 아직도 자신이 그 범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지구는 살해당한 게 아니라 어쩌면 자살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단서도 없었지만 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하고 피식 가볍게 썩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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